그런데 서점에서 '또 자기개발 서적인가' 하고 집어든 책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이 있었다. 몇 페이지 읽어보니 올림픽과 호주여행을 겸한 에세이다. 이 아저씨에게서 실세계의 이야기가 나온다니, 오히려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여하튼 프롤로그가 재미있어서 바로 구입. 이틀만에 다 읽었다. 이렇게 빨리 한 권을 읽는 건 오랜만. 상쾌함을 느꼈다.
이야기의 주축은 올림픽. 그 중에서도 마라톤이다. 그렇지만 양념으로 들어간 호주 여행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특히 호주의 특이한 동물들 ㅡ 오리너구리, 코알라 등 ㅡ을 묘사한 부분이 너무 웃겨서 혼자 키득댔다. 호주로 여행가고 싶어졌다. 가서 코알라랑 상어, 바다뱀을 보고 싶다!
올림픽은 지루하다는 데에 동감이다. 지금까지 올림픽이나 다른 스포츠경기를 챙겨본 적이 없다. 마치 드라마 처럼. 딱히 찾아서 보진 않지만 어쩌다 보게 되면 재밌게 보는 것. 경기 중간에 자리를 떠야 할 때도 왠지 아쉽지만 집에 와서 결과를 찾아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루키가 정작 묘사한 올림픽을 보면, 스포츠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인간의 공격 본능을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극한의 상태까지 몸을 푸쉬한다. 마라톤이 그 절정이다. 잘 만들어진 기계처럼 몸을 만든다. 페이스를 조절하는 몸안의 타이머는 몇 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달릴 때는 정확하게 같은 동작으로 손발을 움직인다. 땀냄새가 나는 가장 아름다운 기계이다. 스스로를 이렇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당분간 달리기에 중독될 듯. (아마도)
최근들어 가장 빨리,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하루키의 글을 좀 더 읽어볼까 한다.
아래는 인상 깊은 구절.
결과는 문제가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손을 벗어난 문제니까.
그러나 결과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양을 이루어 영원히 남고, 경우에 따라서는 앞으로의 세월을 크게 좌우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간에 내면의 악령과 함께 살아간다. 악령은 때로 악몽이라는 형태로 삶에 등장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악몽과 조우하고 어떻게든 극복해 나가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고독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는다. 나는 작가이기에 고독이 지니는 힘차고 찬란한 가치와 위험한 독성을 잘안다. 진정한 가치를 손에 넣기 위해서 우리는 그 독과 함께 살아가는 기술을 체득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긴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그 독은 우리를 습격한다. 교활한 뱀처럼.
우리는 모두, 거의 모두 자신의 약점을 껴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 약점을 없앨 수도, 지울 수도 없다. 약점은 우리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곳에 몰래 숨겨 둘 수는 있지만, 긴 안목에서 보면 그런 행위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일은 약점을 인정하고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약점에 발목 잡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디딤돌로 삼아 스스로를 보다 높은 곳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결과적으로 인간으로서의 깊이를 얻을 수 있다. 소설가든 육상 선수든 평범한 직장인이든 원칙은 같다.
물론 나는 승리를 사랑한다. 승리를 평가한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기분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승리 이상으로 '깊이'를 사랑하고 평가한다. 때로 인간은 승리하고, 때로 패배를 맛본다. 그리고 그 후에도 우리는 계속 달린다.
하루키는 소설보다 산문이 참 잘 읽혀요
답글삭제누구나 다 하루키 이야기를 해서 일부러 안
읽는다는 사람도 있지만. 전 대단한 글을 쓴다고 생각해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라는 장편과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제목의 에세이.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