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3일 목요일

우리가 어제 죽인 괴물

두 번째로 읽었다. 아니, 세 번째라고 해야하나? 남이 낭독해주는 것을 들었다라고 하지 않고 '읽었다'라고 할 수 있다면 세 번째가 될 것이다. 물론 들었다랑 읽었다랑 같지가 않다. 이 책을 세 번 접하니 그게 확실하다.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서호필 선생님께서 선생님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로 읽어주셨을 때이다. 아마 그때도 나는 졸고 있었을 것이다. 국어시간은 재미있었는 데 정신을 차려보면 졸고 있었다. 졸다가 선생님의 힘찬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게 한두번이 아니다. 그 날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어 주셨다.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있다. 누명을 뒤집어쓰고 중죄인으로 몰려, 절해고도에 유배당했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경력이 있는 프랑스 인 앙리 샤리에르의 자전적 소설로써 만든 영화다. (중략)
나는 이 영화의 가상 재판 장면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가상 재판은 주인공 빠삐용의 꿈속에서 진행되는데, 판사가 빠삐용에게 여러 가지 죄목을 나열하면서 유죄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지만 빠삐용은 번번이 결백을 주장한다. 그러자 판사는 <청춘을 낭비한 혐의>조차 인정하지 못하겠느냐고 묻는다. 그렇게 완강하게 혐의를 부정하던 빠삐용도 이 대목에서는 고개를 떨구고 만다.
(중략)
내가 이것을 쓰고 그대가 이것을 읽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시게가 뱉어내는 소리는 <째깍, 째깍, 째깍>이 아니라 <상실, 상실, 상실>이다. (pg. 23-26)


꽤 긴 내용을 읽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바싹 긴장해서 들어야 했다. 우리의 변화를 종용하는 선생님의 목소리, 그리고 텍스트 때문이었으리라. 나의 양심에게 선생님이 묻고 계셨다 - '너의 청춘을 어떻게 낭비하고 있느냐?' 부끄럽고 고개가 숙여졌다.


아직도 청춘을 낭비하는 나의 모습,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낭비를 심하게 하는 나의 모습 때문에 이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러나 선생님이 읽어주셨던 때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때문에 남이 읽어주는 것을 듣는 것과 읽는 것은 전혀 같을 수가 없다. 그때 떨리던 심장이 지금은 없다. 이젠 나의 양심마저 메말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게으른 자신을 꾸짖고자 이 책을 집어들었지만 다 읽은 지금에도 정신이 바짝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를 그리워하며 달콤한 감상에 젖어들 뿐이다. 날카로운 패기는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는지. 아, 나의 젊음은 더이상 젊음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래는 좋은 구절 정리

장 거리 약장수가 약을 팔려면 먼저 사람을 모아야 하듯이, 글로써 자기 뜻을 전하려면 먼저 독자를 글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읽게 해야 한다. 읽히는 데 실패한 주장은 발화(發話)되지 못한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pg.125)

개개인이 홀로서기 하던 고대인들에 견주면 우리는 얼마나 소인배들인가. 지적 비상(知的飛翔)에 관한한 현대인은 신문의 칼럼 이상의 높이로는 결코 날아오르지 못한다. (렌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中) (pg. 191)

나마스떼 - 당신에게 깃들여 있는 신께 문안드립니다. (pg. 206)

관념의 고깔을 벗고 세계 앞에 홀로 나서라. (pg. 212)

세 번 쏘았는데도 과녁에 맞지 않으면 활 쏘는 나의 자세를 살핀다. (pg. 2220


읽고 싶어진 책

그리스 신화의 세계 - 유재원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 이문구
신화, 그림으로 읽기 - 이주헌
시간 무엇인가 - 유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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